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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활

003.부모님이 떠났다

시애틀에 도착해 나의 집이 될 한인 기도원(?) 같은 곳에 짐을 풀었다. 우리 가족은 종교가 없지만 유학원에서 소개를 해준 분들이기때문에, 그리고 미국에는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 방법 밖에 없었다. (미국 학교들은 주로 미성년자 (만 18세미만) 유학생들에게는 부모가 아닌 근처에 거주하는 가디언을 필요로 한다. 보딩스쿨의 경우는 없을수도 있겠다.) 이 기도원의 전도사님 내외가 나의 가디언이였다. 그분들은 나보고 형 누나라고 부르라고 했다. 여태껏 내 삶의 기독교 경험이라고는 한번밖에 없었다. 초등학교때 혼자 집에 있었는데, 교회 사람이 초인종을 눌렀다.  모두가 아는 교회사람의 특유한 능청스러움으로 그 사람은 나의 꿈을 물어 보았고, 어찌어찌 하다보니 그분은 내 머리에 손을 얹고 내가 대통령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었다. 난 너무 무서워 울었다. 기억은 잘 안나지만 그 사람의 너무 터무니 없지만 너무나도 분명한 확신이 무서웠던 것 같다 - 마치 그렇게 하면 내가 대통령이 될수 있는것 마냥, 그분은 숨쉴틈도 없이 기도를 했다. 그분이 그렇게 떠나고 집에서 혼자 문을 두번 걸어잠그고 신발장에서 울면서 혹시 다른 아이가 대통령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어떻게 될까 생각도 했다. 

내가 학교를 시작할때까지는 3주가 남았었다. 

우리는 차를 빌려 학교 근처 여기저기를 놀러 다녔다. 맛있는것도 먹고, 멋있는것도 보고 그랬다. 아버지는 이 여행이 마지막 가족여행이라 했다 (물론 이 이후에도 많았다). 아버지는 항상 그러셨다. 뭐든지 마지막이라, 이제는 다시는 이렇게 가족끼리 여행 못한다, 하셨다. 아버지의 이런 종말론적(?)인 사상이 어쩌면 내가 이별을 대하는 태도를 만든 것 같다.  그렇게 가족 넷이서, 형, 나, 어머니, 아버지, 이렇게 여기저기 돌아 다녔다. 크게 인상이 깊거나 좋았던 기억은 없었다. 전형적인 관광명소를 다니고, 사진을 찍고, 맛있는걸 먹었다. 그때의 나에게는 그런 부유함과 편안함 보다는 혼자서 서든어택을 하거나 인터넷을 마음껏 하는 게 더 좋았다. 

밥을 먹을때도, 내가 원하는걸 골랐고, 가격에 대한 큰 우려 없이 보고, 즐기고, 먹었다. 차를 타면 잠이 들었고,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나에게는 (부모님에게는 나름 고역이였겠지만,) 럭셔리한 여행이였다. 

그렇게 차츰 이곳의 낮과 밤에 익숙해 질때쯤, 어머니가 우셨다. 마지막 밤 이였다. 어머니가 막 우셨다. 난 어쩔줄 몰랐다. 괜시리 나도 슬퍼졌고 울고싶었지만, 다같이 우는건 도움이 안될거 같아 자는척 했다. 어머니는 이내 아버지의 만류에 숨을 죽이며 흐느껴 우셨고, 그렇게 그 밤은 , 그 방은, 나에게 잠잠한 지옥이 되었다. 난 아무것도 하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하고싶지도 않았다. 머리가 너무 아프고 제발 어머니가 흐느낌을 멈췄으면 하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그 크고 어두운 방에서, 어머니의 흐느낌만이 방을 가득 채웠고, 난 숨이 막혀 머리가 너무 아파 눈을 감았다.  그렇게 내 14살의 마음을 질끈 감고 있을때쯤, 아침이 찾아 왔다. 밖은 눈이 와 새하얀 세상이 되었다. 원래 학교를 가게 되어 있지만 눈때문에 학교도 일주일 정도 쉰다고 했다. 잠을 못 자 머리가 너무 아팠다. 밖에서 차고 건조한 공기를 맞으며 온통 흰색인 세상을 바라보았다. 계속 바라보면 눈이 따가워 머리가 또 아팠지만, 반대편에는 나의 가족들이 짐을 차에 실고 있었다. 밖은 눈 때문인지 너무 조용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지만, 이내 트렁크를 닫는 소리가 들렸다. 쿵. 그 이후로는 잠깐 기억이 나질 않는다. 기억나는건 오직 서서히 떠나는 차와 펑펑 우시는 어머니, 애써 매정하려 하지만 착찹한 아버지의 표정. 형도 나처럼 경황이 없었을 것 같다. 왜 동생을 두고 자기는 가족들이랑 한국을 돌아가는지.

디젤 차의 두꺼운 매연이 걷히고 다시 조용해졌다. 정신을 차려보니 눈이 너무 아팠다. 차는 사라진지 오래였고, 나혼자 바보같이 서있었다. 위로를 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당장 해야하는 일도 없었다. 그 전도사 내외는 예배를 준비하러 집에 들어갔다. 큰 흰색 진공에 나홀로 놓여진 기분이였다. 눈이 너무 아파 서둘러 내 방으로 들어갔다. 방에 들어가니 손이 차가움을 느꼈다. 내방은 정말 정직한 사각형이였고, 침대와 플라스틱 책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¾ 이 비어있는 그런 방이였다. 뭔가에 홀린듯이 난 노트북을 켜 서든어택 (총게임)을 했다. 뭐라하는 사람도, 방해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해가 지고, 어두워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아무 빛도 없는 곳에서, 계속 서든어택을 했다. 그 네모난 화면에 나를 조금씩 바치며, 차라리 이 낯선 환경에, 진공같은 방에 혼자 남겨진 14살 나 보단, 총을 맞아도, 수류탄에 터져도, 다시 살아나 총을들고 돌진하는 캐릭터에, 나를 바쳤다.  어릴때 생각이였을수도 있지만, 그때는 내 자신의 상황을 인지하는게 너무 고통스러웠고 힘들었었다. 그래서 한시도 쉴틈없이 서든어택을 하고, 만화를 보고, 웃긴 영상을 보고, 그랬다. 가끔 전기가 끊기거나 (생각보다 자주 전기가 끊겼다), 잘 시간이 되어 그 네모난 화면이 꺼지면, 난 그 크고 고요한 방에 오롯이 나의 생각과, 나의 존재와, 나의 상황과 남게 되었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고요한 천장을 보고 있으면, 어머니의 흐느낌과, 떠나는 차의 뒷모습과, 온 세상에 혼자 있는듯한 느낌이 나를 쪼아 고통스럽게 했다. 그러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머리가 아파와 내 속에는 온전히 슬픔만 남게 되었고, 난 마치 눈물을 멈출수 없는 병에 걸린 사람처럼 목놓아 울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침 이였다. 아침이 되면 홈스테이 누님이 만들어준 베이글 샌드위치를 먹고 다시 부정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렇게 10일을 보냈다. 지옥같은 날들이였다. 재생성되어 다시 전쟁터로 뛰어 나가는 게임속의 캐릭터와같이, 나는 기계적으로 그렇게 하루하루 나를 마비하며 흘러갔다. 어제같은 내일이 너무 싫었다. 

홈스테이를 했던 어르신분들은 나를 딱하게 여기셨는지 최대한 많이 데리고 나가셨다. 쇼핑몰에 나가 이것 저것도 보고, 나름 맛있는것도 먹이고. 하지만 나에게 그것들은 낯섬과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였다. 나는 지속적으로 노트북안의 네모난 세계에 모든걸 바쳤고, 그 세계의 지속적이고 자극적인 긴장감이 끊임없는 슬픔에서 휴식할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밖은 너무나도 새로운 것들이 많았고, 그건 14세의 내가 건설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상황이였다. 나에게 남은 익숙한건 모니터 안의 세계 뿐이였고, 낯선 어른들은 어려워 하는 나에게 ``주님에게 기도하면 괜찮아 질거야’’ 라는 소리를 했다. 속는셈 치고 난 기도를 했지만,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 조용한 방에서 나를 구해줄건 나의 노트북 뿐이였다. 내 안의 슬픔을 고요하게 해주는 인터넷의 다양한 자극들 뿐이였다.

그게 나의 첫번째 이별이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이별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할 기회가 많지 않은 듯 하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는 이별이 많다. 또한 모든 자극이 그렇듯, 나의 이별에 대한 반응도 바뀐다.

물론 내가 글재주가 없는 것도 있지만, 이 일련의 사건들이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 12년전 일이기도 하고, 항상 머리가 아프고 하루하루를 멍하게 보냈었다. 게임이나 만화같은 당장의 강력한 자극에 내 시간과 삶을 맡기고, 그것들에게 끊임없이 내 정신을 내어줬다.

그렇게 밤낮의 경계가 다시 흐려지고 그렇게 하고 싶었던 서든어택이 질릴때 쯤 학교를 가게 되었다. 학교는 30분 거리에 있어서 새벽에 홈스테이 형님이 차로 근처 교회에 데려다 주시면 거기서 버스를 타고 가는 형식이였다. 내 기억이 흐린건지 모르겠지만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다. 한 평생 수동적으로 살아와서 그런가, 아무런 생각없이 부모님을 공항에 데려다 주었던 차를 탔고, 버스가 오는 교회에 도착했다. 곧이어 버스가 왔고, 별 생각없이 탑승했다. 예전에 미국 하이틴 영화를 본적이 있었는데, 그 영화에서는 학교 버스를 전쟁터라고 묘사했다. 수상한 아이들이 마약을 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안경쓴 아이가 있으며, 격하게 키스하는 커플이 있는 전쟁터. 하지만 내가 탄 버스는 그런 버스가 아니였다. 앞쪽에는 아이들이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고 (학교가 초/중/고 통합이라 나이순으로 앉는 듯 하다), 뒷쪽에는 정말 평범해보이는 또래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동양인은 나뿐이였다. 자연스레 관심이 나에게 쏠렸지만, 난 너무 피곤해 아무 자리나 앉아 잠을 잤다. 어렸을때 부터 나는 상황이 불편해지면 잠을 (자는 척을 하거나) 잤다. 특별한 이유는 없지만 그냥 사람들과 말 섞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눈을 감으면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버스 기사가 깨워 일어나보니 학교였다. 사람들은 다 여기저기 상기된 얼굴로 제 갈길을 가고 있었고, 난 혼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처음으로 누군가 나에게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냥 버스에서 내려 서 있었다. 특별한 경험이였다. 그렇게 우두커니 있다가 몸이 추워 가장 가까운 문을 찾아 들어갔다. 요즘말로 정말 1도 모르는 상황에서 발이 닿는대로 걷다보니 누군가가 나를 중학교로 안내해 줬고 그렇게 학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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