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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활

002.배경

1993년 2월 25일에 태어나, 큰 탈도 성공도 없이 어린 시절을 보냈다. 특별한게 있다면 태권도를 한적이 없는 정도?로 정말 무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2001년쯤 아버지의 안식년에 (교수이시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일년을 보냈다. 거기서 영어를 배웠고 그 이후로 쭉 남들보다 영어 하나는 잘했다.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도 초등학교에서 특별 대우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영어선생님이 보이스카웃을 맡고 계셔서, 그리고 나를 이상하게 아끼셔서, 보이스카웃 학교 대표가 되었다. 그때 하신 말씀이 왜 기억나는지 모르겠지만 A rolling stone gathers no moss 라고 하셨다. 초등학교때의 별 기억은 없다. 무난하게 학교를 다니면서 엇나가지도 지루하지도 않은 시절을 보냈다. 친구랑 왕뚜껑 하나 먹는게 행복인 (그때는 500원짜리 도시락 대신 800원짜리 왕뚜껑을 먹는게 굉장한 사치였다.), 세뱃돈으로 바람의나라 (어린친구들을 위해 - 메이플 스토리 같은거다) 가이드북을 사는게 사치인, 그런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그러고 중학교에 들어갔다. 여기서도 특히 엇나가거나 문제가 있는건 아니였다. 고만고만한 친구들과 유희왕 카드를 하고, 피시방을 가고, 미지의 어른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을 어색하지만 적나라하게 함께 풀어나가는, 그런 중딩이였다. 공부하는면에서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형이 그때 공부를 잘했던걸로 기억한다. 부모님도 욕심이 있으셔서 내가 첫 시험에서 전교 109등을 했을때 아버지가 굉장히 많이 화 내셨다. 그때는 다소 충격이였다. 초등학교때는 마냥 행복하고 건강하게만 자라는게, 가끔 부모님 어깨를 안마해드리고 옆집 어르신에게 인사를 잘 하는게 효도라고 생각했던 나는, 별 탈없이 그냥 존재하는게 `잘 하는것’ 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의 `평균적’인 삶은 부모님에게 만족을 드리지 못했고, 그때부터 나의 가치에 대해 고민을 했다. 학교 다음 학원이였다. 시험기간이 되면 집안이 죽을듯이 조용해졌다. 그 고요한 집에서 방에 문을 닫고 책을 피고 있으면,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어제도 봤고 내일도 볼 내용인데 이렇게 무작정 붙잡고 있는게 그냥 너무 싫었다. 주말에도 학원에 나가 큰 몽둥이를 들고 다니는 (지금 생각하면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체벌이 큰 동기부여 방식이였다..!) 선생들의 감시하에 암기과목을 외우고 시험봤다. 빽빽이라는 말도 안되는, 허나 되돌아보면 이상하게 효과있는 암기방식으로, 영혼은 가출한채 빈 종이를 지식들로 채워 나갔다. 점심시간에 나가 먹는 맥도날드나 곱배기 밀면이 매주의 하이라이트 였다. 친구들과 보내는 한시간 점심시간이 너무나 신나고 기다려졌다. 일요일 밤이 되면 가족이 모여 앉아 보던 개그콘서트 (지금의 코미디 빅리그 같은 프로그램이다..!)를 봤다. 하지만 시험기간에는 무거운 정적만이 나와 가족 사이에 있을뿐이였다. 그게 너무 답답했다. 그렇다고 비행을 하거나 공부를 완전 못했던건 아니다. 비행을 하기에는 겁이 너무 많았고, 공부를 못하기에는 학원을 너무 많이 다녔다. 

그렇게 일관성있게, 평균적으로 (기준에 따라 다르지만 나의 아버지에게는 평균 이하, 나에게는 평균적으로)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어쩌다가 유학얘기가 나왔다. 아버지 입장으로써는 내가 안돼보였나보다. 나도 생각을 해보니 이대로 있다가는 이도 저도 안될거 같아 한번 해보자라는 생각이였던것 같다. `외교관이 되고싶다’ 라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을 뿐, 큰 계획이나 생각이 없었다. 지금부터 계속 나오겠지만 정말 난 큰 생각이나 계획이 없었다. 뭔가 미국이라는 나라가 나에게 또 다른 기회를 줄수 있을것 같았고 일단 내가 한국에서는 행복하지 못했던건 확실한것 같다. 내 개인의 행복보다 나의 부족으로 부모님이 행복하지 못한게 난 참 죄송스러웠다.  지금 생각이 드는 거지만 내 개인의 자아 같은건 없었던 것 같다. 짜여진 스케쥴에 맞게, 남들의 기대에 맞게, 지극히 남을 위해 흘러가는, 껍데기 같은 삶이였다.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는, 그저 가끔 먹는 맥도날드가 좋은, 성적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그런 평범한 중학생이였다. 

이렇게 쓰고나니 참 재밋는 듯 하다. 이런 삶이 평범한 것이였다는게 참 슬프다. 어찌보면 지금 우리 사회가 위로에 목메는 것도, 소확행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열광하는 것도, 어찌보면 이런 억압되어있었던 트라우마에서의 반응일수도 있겠다.

비록 조기 유학을 갈 정도로 많이 부유한 집안은 아니였지만 운이 좋아 워싱턴주 시골동네의 사립 기독교 학교로 갈수 있었다. 그렇게 준비를 하는 동안 나는 이제 삶이 송두리채 바뀐다는것도 모른채 단지 내 개인 노트북이 생긴다는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지만 그때는 아무에게도 방해 안받고 서든어택을 할수 있다는게 행복 그 자체였다. 솔직히 많은 생각을 두진 않았던것 같다. 그냥 단지 지금의 무료하고 반복적인 삶이 바뀔수만 있다면 뭐든 하고 싶은 심정이였다. 잘할 자신이라던가 꼭 뭐가 되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어찌보면 도피성 유학이라고 할수도 있겠다. 내가 가진건 영어 밖에 없었다 - 운동이나 음악에 특출난 재능이 있는것도 아니였고, 수학 경시대회 입상이나 이런건 생각도 해본적이 없었다. 어렸을때부터 부모님 옆에서 물 흐르듯 하라는대로 사는게 내 삶이였기에 계속 그냥 흘러갔다. 

비자 인터뷰를 위해 대사관을 가야했다. 사태의 심각성도 모른채 나는 학교를 하루 안간다는 사실에 너무 행복했다. 그때에는 평일 낮에 밖에 있기만 해도 뭔가 기쁜, 그런 나이였다. 

다니던 중학교를 자퇴했다. 뭔가 그때 당시에는 짜릿짜릿한 경험이였던것 같다. 중2병의 정점에서, 나는 학교에서 자퇴하고 학교라는 감옥에서 해방되었다. 교복이라는 죄수복을 벗고 기회의 땅, 평등의 나라, 미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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