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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활

입대

미국 대학 유학생이라는 어찌보면 세상에서 가장 자유로운 환경에서, 한국 군인이라는 가장 제약이 많은 곳으로, 그렇게 한순간에 바뀌었다.

난 지뢰병이였다. 처음에는 통역병으로 가려고 했다. 아버지가 그러길 바랬기때문에 시험까지 쳤지만, 떨어졌다. 정신승리처럼 들릴수 있겠지만 나는 통역병이 멋있지 않은 직책이라 생각했고, 예전에는 군인은 뭔가 빡센걸 해야하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그래서 통역병이 떨어지고 해병대를 지원했지만, 할머니의 만류로 빠른 시일내에 논산육군훈련소로 입대를 하게 되었다.  입대날이 다가올때마다 뭔가가 나를 죄어오는것처럼 답답했고, 그런 감정을 잊기 위해 열심히 클럽도 다니고, 놀고 해봤지만, 마음이 더욱 허무하고 슬플 뿐이였다. 그래서 입대하기전 2주부터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하면 민망하고 오그라들지만, 그때 당시에는 나는 군대를 가면 죽는 줄 알았다. 미국에서 계속 생활을 했기때문에 군대에 대해서 얘기해줄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군대를 가면 맨날 맞고, 그러다 죽는 줄 알았다. 편지를 쓰기 위해 나는 페이스북에 들어가 내가 친한 사람들의 명단을 뽑았고, 2주동안 그 사람들에게 장문의 편지를 적었다. 지금은 딱히 기억이 나질 않지만, 머리를 밀고 카페에 혼자 앉아 편지를 쓰는 내 모습이 굉장히 찌질했을거라 생각이 든다. 그렇게 대략 50편의 편지를 써서, 대부분은 페이스북 메시지로 내 인생의 중요했던(?)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시간이 되어 2012년 10월 22일 버스를 타고 논산으로 향했다. 어머니가 동행했고, 같이 갈 친구도 없었다. 아버지와 아버지 친구들은 ‘진환아 아저씨가 아는 사람 있으니까 걱정말고 가서 있어라' 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했고, 나는 내심 ‘알아서 잘 되겠지’ 라고 생각했다. 이 의미심장한 말은 나중에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다. 논산에 가니 나와 비슷한 빡빡이들이 많았다. 각자 부모님, 여자친구, 친구들과 와서 복잡미묘한 얼굴로 밍기적 거리고 있었다.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는 의도였는지 강당에는 사회자가 농담을 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자세한 사항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건 어머니가 그냥 옆에 계셨다. 그냥 서 계셨는데, 말로 설명할수 없을 정도로 그냥 계셨다.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우왕자왕 시끄럽던 강단이 갑자기 조용해지며, 사회자가 이제 같이 온 사람들한테 인사하고 입대예정 장병들은 2층으로 올라가라고 했다. 이 발표가 있자마자 강단은 눈물바다가 되었고, 모두가 애써 막아놨던 감정의 벽이 허물어지고, 이제는 다가온 현실에 눈물을 흘리며 포옹을 했다. 감정이 풍부한 나의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였다. 멀쩡하게 있던 사람이 갑자기 펑펑울며 알아들을수 없는 말을 해댔다. 나는 중학교때 펑펑우시던 어머니가 생각이 나며 덜컥 겁이 났다. 그때의 그 감정을 다시 겪고싶지 않았다. 나는 어머니를 덥석 안고 걱정하지 말라고 하며 어머니를 뒤로한채 2층으로 제일 먼저 뛰어갔다. 그때 당시에는 졸라 멋있었던 것 같은데 지금 생각하니 그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혼자 남겨진 어머니가 어땠을까, 굉장히 죄송한 마음이 있다. 나는 이별을 너무 자주 했고, 질질 끌어봤자 좋은게 없다는걸 알기 때문에, 항상 빨리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한다. 하지만 항상 까먹는건 거기서 남겨지는 사람들이다. 혼자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가는 어머니, 혼자 공항에서 집으로 가는 어머니,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어쨋든 2층으로 올라갔다. 아저씨(그때 당시에)의 명령에 따라 다른 강당으로 들어가니 비어있었다. 내가 처음이였다. 그렇게 맨 앞으로 가서 땅바닥에 주저 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렸고, 지금 상황이 정확히 인식이 되지않았다. 그렇게 얼굴을 손에 묻고 머리를 비웠다. 중학교때부터 많은 감정이 밀려들어올때면 이렇게 머리를 비우는게 훨씬 덜 아프다는걸 알았다. 그렇게 머리를 쳐박고 있다보니, 한명한명 사람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군생활이 시작이 되었다. 구체적인 군대의 삶이나 훈련소 내용은 주변 아무나 물어봐도 알수있는 내용이기에 적지 않는다.

군대에서는 진짜 열심히 했다. 초반에는. 군대를 가기전 나는 자존감이 눌러담은 밥처럼, 아니 떡처럼, 밀도있게 차있었다. 1학년 2학기에 올에이를 받았었고, 신체능력도 굉장히 만족스러운 수준이였고, 그때 만나던 사람도 누가봐도 예쁜 그런 사람이였다. 그리고 규칙적인 생활이 몸에 베여있었기 때문에, 훈련소는 나름 재미 있었다. 애국가를 부르는 것도 즐거웠고, 군가를 배우고 옆에 사람들이랑 발맞춰 걷는것도 재밌었다. 밥은 맛이 없었지만, 큰 기대를 안한지라, 그리고 항상 닭가슴살만 먹던 나여서 그닥 슬프진 않았다. 나대는게 익숙했던지라 논산 훈련소에서 소대장 훈련병을 했었고, 하고 나서 굉장히 후회했다. 군대가 나에게 가르쳐준 소중한 교훈중 하나는 리더가 굉장히, 굉장히 어려운 직책이라는 것이다. 특히 한국 군대라는 집단은 굉장히 특이하다. 수많은 인구에서 랜덤으로 사람들을 뽑고, 그런 사람들을 굉장히 느슨한 분류 체계에 의해서 분류하고, 같이 생활하게 하는건데, 여기서 더 큰 문제는 인센티브이다. 사람이라는건 인센티브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에게 큰 이득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에서는 돈을 주고, 학교에서는 성적을 주는데, 군대에서는 딱히 주는게 없었다. 일반적으로 모두가 ‘버티기 모드' 이기 때문에 (국방부의 시계는 그래도 간다, 라는), 일부러 나서서 열심히 하고, 일을 찾아서 하는 사람이 없다. 그걸 몰랐던, 미국에서 온지 얼마 안된 이 어리석은 중생은 자처해서 힘든일을 하려했고, 이게 멋있는줄 알고 여기저기 열심히 했다. 소대장 훈련병이라는 직책은 굉장히 어려웠다. 그런 인센티브가 하나도 없는 사람들을 인솔해야 했었고, 그런 사람들의 나태를 책임져야 했으며, 나에게 주어진 권한은 거의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점점 화가 나기 시작했고, 나도 에라 모르겠다 하며 뒤에 빠지길 바랬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봤자 돌아오는건 없었고, 고마워 하는 사람도 없었으며, 나의 행동에 무관하게 국방부의 시계는 흘러갔다. ‘열심히 하면 너만 손해다'라는 말이 말이되는, 그런 곳이였다, 군대는. 그렇게 정말 ‘혼나지 않을정도로' 만 일을 하니 모든게 편했다. 내 주위사람들도 편했고, 모든게 안정되었다.

난 솔직히 관심병사였다. 신병이 전입오자마자 몇개월 동안 유지하는 그런 스마일 따위가 아닌, 진짜 관심병사였다 (내 추론이지만 아마 맞는 것 같다). 우리 부대는 독립중대였는데, 중대 하나만 덩그러니 따로 부지가 있는, 그래서 부조리도 많고 뭔가 잘못되어도 잘 모르는, 그런 부대였다. 100명 남짓의 남자들이 막사 하나를 끼고, 전쟁이 나면 빠른 출동을 위해서 그렇게 떨어져 있는, 그런 곳이였다. 아직도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지뢰학교를 마치고 드디어 자대로 배치를 받는 버스를 탔는데, 그때가 2013년 1월 1일이였다. 도축장에 끌려가는 착잡한 심정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창밖을 보니 `38선 식당’ 이라는 식당이 보였고, 그렇게 굉장히 위쪽 (전방쪽)으로 향했다. `38선 식당’을 보니 아저씨만 믿고 걱정하지 말라던 아저씨들의 얼굴들이 스쳐지나가며 울컥했다.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위해 있는가 생각이 들며 머리가 하얘졌다. 그렇게 도착해서 대대 인사과에 도착했다. 대대 인사과에서 앉아서 기다리라고 했다. 앉아서 기다리다 보니 이상한 사람이 와서 방탄모를 던져줬다. 아직도 그게 누군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렇게 그 추운 겨울날 방탄모를 쓰고,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명령에, 트럭뒤에 탔다. 강원도의 1월은 굉장히 춥다. 그 추운데 트럭뒤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고, 어딘지도 모르는 곳으로 실려가고 있었다. 앞선 2개월은 나에게 생각을 하지 말라고 가르쳐줬다. 생각을 하고, 이건 잘못되지 않았나, 라고 생각할수록 나만 힘들어지기에, 그냥 하라는대로 하고, 혼나지 않을정도로만 있으면서 버티라고. 그렇게 매서운 바람을 뚫고 30분가량 달렸다. 너무 머리가 아파 나는 잠이 들었다. 왠지 `여기서 잠들면 죽어’ 같은 상황이였지만,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잠이 들어 있었는데, 옆에 동기가 나를 깨웠다. 뭔가 싶어 잠에서 깨었더니 철문이 열리고 다수의 남성의 함성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트럭은 조심히 연병장을 통해 막사 앞으로 향했고 그곳에는 모든 중대원이 나와 소리를 지르며 환호하고 있었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느낌일까, 그들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같았다. 그렇게 얼을 타고 있는데, 내이름이 들렸다. 배진환 배진환이 누구야, 라는 소리에 이병 배진환을 외치며 가방을 빼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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