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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rt Essays

어머니

예전에 서울대학교에 페미니즘 토크 콘서트를 보러 간 적이 있다. 큰 강의실에서 한시간 반정도 이뤄졌는데, 패널리스트들이 주장한 것은 `난 우리엄마처럼 살지 않겠다’ 였다. 페미니즘에 문외한 이였기때문에 난  패널리스트들이 굉장히 못됐다(?) 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자신을 낳아주고 길러준 어머니에게 이런말을 할수가 있지라고 생각했고, 솔직히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넘겨 짚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난 그 사람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어머니’의 역할은 정말 부당한 직책이였다. 우리 사회는 모성애라는 집단 최면으로 여성들에게 자신의 꿈과 열정을 `접어두고’ 주도하는 역할이 아닌 보조하는 역할로 밀어낸다. 집안일은 쉬운일이 아니며, 일에비해 받는 보수는 잔인하게 낮다. `내새끼 인생’ 이라는 큰 책임감을 전적으로 짊어지지만, 결정권에는 큰 목소리를 낼수가 없다. 알바천국에 이런 채용공고가 있으면 아무도 지원을 안하지 않을까.

공교롭게도 나의 어머니도 82년생 그분과 같은 이름을 가졌다. 또한, 공교롭게도, 아니면 사실 놀랍지 않게도, 82년생 김지영을 비롯한 많은 여성들과, 비슷한 삶을 사셨다. 지영씨는 하고 싶은게 많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고 (어머니랑 고스톱을 친적이 있다. 눈빛은 살벌했고 손은 빨랐다. 난 이때 어머니가 두 종류의 동양화를 다 전공하셨구나 라고 생각했다. 두려운 경험이였다.), 사진촬영을 배우고 싶었으며, 연극, 음악, 패션, 경영, 이미지메이킹, 못하는게 없다 (운동빼고..!). 하지만 이렇게 꿈많고 재능많은 이 개인은 두 아들의 어머니라는 타이틀을 얻게 되면서 이런 열정들을 접게 되었다. 신옥자 딸 박지영은 배용찬 부인이 되었고, 현태 (형이름) 엄마가 되었다. 현태엄마는 현태와 진환이의 엄마였고, 그 외의 삶은 크게 존재하지 않았다. 현태엄마는 좋은 학원들을 알아보고, 밥을 했으며, 빨래를 했다. 현태엄마는 현태의 과외가 자정에 마치면, 쪽잠을 자다가 현태를 데리러 차를 타고 나갔다. 진환이가 말썽을 부리거나 비행을 하면 누구보다도 슬퍼하고 책임감을 느꼈다. 현태와 진환이의 성공과 실패는 전적으로 현태엄마의 책임이였고, 학원비를 내거나 일년에 네번 성적표가 나올때를 제외하고는 아버지는 크게 관여를 하지 않았다. 엄마는 항상 곁에 있었다. 전화를 하면 항상 받았고, 왠만하면 집에 있었다. 양말을 뒤집은채로 땅바닥에 던져놓으면, 마법적으로 그 양말은 씻겨지고, 말려져 나의 서랍에 가지런히 놓여져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아니,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당연한 일이였다. 엄마라는 사람은 거진 아이들을 위해 존재한다는게.

유학을 하면서, 이런 상황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다. 논리적으로 생각해보니 왜 엄마는 이렇게 까지 하며, 왜 이게 당연한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여태껏 나는, 다소 이기적이게도, 엄마의 행복은 아들들의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좋은 성적을 받는게 어머니의 행복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아니다. 박지영씨는 현태엄마 이기전에 꿈과 열정을 가진 개인이였고, 개인이 이룰수 있는것에 따른 행복이 있었다.

다행이도 지금 현태엄마는 다시금 박지영으로 멋있게 사회에 진출해 강의를 하고,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난 걱정이 컸다. 현태엄마로써 이렇게 살아왔는데, 우리가 독립해버리면 본인의 아이덴티티에 공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지영은 똑똑하고 멋있는 여성이였다. 사회의 부당한 요구에 우아하게 대처하면서, 본인을 잊지 않았다. 끊임없이 공부했고, 앞으로 나아갔다. 가끔 한국에 가면 어머니는 나와 데이트도 한번 못할정도로 바쁘시다. 나는 어머니가 바쁜게 너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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